예수를 따라 죽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이요!

1926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초량교회에 30세로 부임한 주기철 목사님은 오직 기도로써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시는 주님을 구했습니다. 경성에 조선신궁이라는 신사를 차려놓고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일제라는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의 적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딴 일은 못하지만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에는 앞장서겠다.” 주기철 목사님은 기도의 투사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십자가의 고난과 영광을 바라보며 피와 땀의 기도를 드리셨던 주님의 기도를 닮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총명이나 재주를 믿지 않았습니다. 주 목사님은 우리의 적이 우리의 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불철주야 기도와 성경읽기 외에는 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 목사님의 설교 하나하나는 모두가 피땀나는 기도와 체험의 소산이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천근만근의 무게를 가지고 청중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저쪽 하늘나라의 영광을 똑똑하게 보여주는 망원경이 되었습니다. 1938년 새로 지은 산정현교회의 헌당예배를 드리며 그는 의심 없는 확신으로 설교했습니다.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은 것이오,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입니다. 주께 바쳐 일사각오, 부활 진리를 위해 일사각오...”
그해 일본 경찰은 신사참배 안을 가결시키기 위해 장애물이 되는 주 목사님을 검거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스스로에게 ‘죽음의 준비는 되어 있는가?’라고 물으며 간절히 기도한 후에, 경찰의 회유에도 “다시 생각할 만한 근거가 없소”라고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는 일사각오로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기로 굳게 결심한 것입니다. 다시 예수님을 만날 때, “너는 내가 받고 오라는 잔을 받고 왔느냐?”라는 질문을 받을 것을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7개월을 시달리다가 3일간의 회유기간으로 석방되었을 때였습니다. 오정모 사모님은 “승리하셨습니까?”라고 인사를 한 후에 “사흘 동안만 푹 쉬고도 다시 들어가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의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하는 격려의 말이었습니다. 사모님은 주 목사님에게 속삭이듯이 말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목사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예수님만큼은 사랑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이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승리하여 순교의 길을 가기를 바라는 진정한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주 목사님은 주를 위해 받는 고난을 영광과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즐거움의 근원이시다. 모든 죄를 벗어버리고 죄인이 하나님께 죄 용서를 받고 구원받는 즐거움 이상의 기쁨은 없을 것이다. 세상의 향락을 고통의 씨요, 하늘의 즐거움은 즐거움의 씨가 된다. 순교는 부득이한 순교가 아니라 감사한 마음에 겨워서 드리는 희생이다. 잘 살 준비 이상으로 죽음의 준비가 더 필요하다” 1944년 봄, 7년간의 옥중 투쟁을 끝으로 주기철 목사님은 순교의 제단에 드려졌습니다. 그의 장엄한 순교의 역사는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복음의 글 발췌)